지난 8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의제는 단 하나, “AI로 제조와 에너지, 전장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였다. 그리고 6월 29일, 구 회장의 취임 8주년에 맞춰 LG의 AI 청사진이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HBM이 없다. 이것이 LG가 AI 시대에 풀어야 할 구조적 숙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로 엔비디아발 특수를 최대한 누리는 동안 LG는 전통적인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구 회장이 내놓은 해법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AI는 단순 효율화 도구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의 동력”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강조했다. HBM이라는 정면승부 대신 LG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AI 생태계를 재편하겠다는 복안이다.
LG의 해법은 산업 인프라다. 냉각 시스템과 전력 관리 솔루션, 산업용 센서, OLED 디스플레이, 배터리 소재 — 이 모든 것은 AI 데이터센터와 스마트팩토리를 움직이는 필수 부품이다. 초거대 AI ‘엑사원’을 자체 개발 중이지만 이는 범용 챗봇이 아니라 제조와 에너지, 전장 같은 실제 산업 현장에 AI를 심는 용도로 설계됐다. 공장의 불량률을 낮추고 전력망 효율을 최적화하며 자동차 센서 데이터를 실시간 처리하는 데 특화된 산업용 AI인 셈이다.
숫자로 보면 LG의 AI 전환 의지가 더 뚜렷해진다. LG전자는 올해 AI와 전장 R&D에만 전년 대비 20% 이상 증액한 4조원대를 투입 중이다. LG CNS의 AI 사업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에만 이미 6,500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35% 성장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AI 기반 배터리 설계 플랫폼을 도입해 신제품 개발 기간을 30% 단축했으며, LG디스플레이는 AI 서버용 OLED 패널로 연간 5,000억원 이상의 신규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LG이노텍 역시 AI 카메라 모듈로 자율주행차 시장을 공략 중이다. HBM 매출은 전무하지만 AI 산업의 하드웨어 인프라 전반에 걸쳐 매출 포트폴리오를 촘촘히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업계 반응은 엇갈린다. “삼성과 SK의 HBM 독점 체제 아래서 차별화된 AI 전략을 가져간 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라는 긍정론과 “결국 AI 칩 없이는 밸류체인에서 핵심 지위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신중론이 공존한다. 다만 엔비디아와의 회동 이후 LG디스플레이의 AI 서버용 OLED 패널 공급 논의가 급물살을 탄 점은 주목할 만하다. HBM으로 연결되지 못한 파이프를 OLED로 뚫을 가능성이 현실화된 것이다. 젠슨 황 CEO가 과거 “OLED는 AI 데이터센터의 차세대 디스플레이 표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어 후속 협상 결과에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구광모 회장의 이번 행보는 LG가 ‘AI 비수혜주’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겠다는 공개 선언으로 읽혀요. 칩이 없으면 인프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은 단기 실적보다 산업 구조를 읽는 안목에서 나온 결정이거든요. HBM 전쟁에서 한발 물러난 대신 AI 공장을 움직이는 심장과 신경망을 쥐겠다는 복안은 대기업 집단 중에서도 특히 B2B 인프라에 강한 LG다운 우회로예요. 다만 구 회장이 스스로 강조한 ‘속도’가 관건이에요. 엑사원의 산업 현장 적용 결과와 엔비디아와의 후속 협력 소식이 올 하반기 이 전략의 진짜 시험대가 될 거고요.
- 원문: 블로터 — [구광모 리더십 8년]① HBM 없는 LG, ‘AI 수혜주’ 반전 꾀할까
- 작성: sw4u 9시뉴스 안나영 / 2026-06-29 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