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술이 있어도 시장이 없을 수 있다.” 화물 운송 비영리단체 카탈리스트 모빌리티의 마이클 베루베 최고경영자는 전기 트럭 확산의 병목을 이렇게 짚었다. 그 병목을 깨겠다며 출범한 화주 연합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기 8등급 트럭 주문 2,500대를 발주하면서 테슬라 세미를 주력 차종으로 골랐다.

출처: Electrek
2,500대와 그 뒤의 1만 대
주문 주체는 ZET SCALE이다. 정식 명칭은 ‘전기화를 선도하는 무공해 트럭 화주·운송사 연합’으로, 카탈리스트 모빌리티(옛 칼스타트)와 스마트 프레이트 센터가 공동으로 출범시켰다. 창립 화주로 마이크로소프트와 펩시코가 참여했다. 테슬라는 경쟁 입찰을 거쳐 주력 제조사 자리를 따냈고, 켄워스와 볼보, 라이드가 보조 공급사로 이름을 올렸다. 테슬라가 단독 공급사가 아니라는 점은 이 주문의 성격을 보여준다. 테슬라는 “세미 2,500대 수주”라고 발표했지만, 연합 기준으로는 2,500대 가운데 주력 비중을 맡는 구조다.
규모는 미국 전기 8등급 트럭 시장 전체를 다시 쓰는 수준이다. 일렉트렉에 따르면 이 주문 하나로 미국 도로를 달리는 전기 8등급 트럭 대수가 거의 두 배가 된다. 연합은 장기적으로 1만 대 이상을 목표로 제시했다. 차량은 향후 몇 년에 걸쳐 로스앤젤레스, 스톡턴, 베이커스필드, 시애틀·터코마, 휴스턴, 댈러스, 샌안토니오, 시카고, 애틀랜타, 뉴어크·뉴욕 등 10개 거점에 배치된다.
잔존가치 리스크를 대신 지는 구조
금융 구조가 눈에 띈다. ZET 파이낸셜이 구매 주문을 발행하고, 운송사 장부에서 잔존가치 위험을 떼어내는 ‘ZET 리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신형 전기 트럭을 살 때 운송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몇 년 뒤 중고 가격인데, 이 위험을 연합 쪽이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테슬라 세미 프로그램 총괄 댄 프리스틀리는 연합의 목표가 “우리의 운영상 이점을 규모로 증폭시킨다”고 평가했다.
물량이 아니라 생산이 문제다
수요는 이미 확인됐다. 한 달 전 아이엔라이드의 500대 주문이 최대 기록이었는데, 이번 주문은 그 다섯 배다. 같은 날 북미 최대 드레이지 운송사 중 하나인 IMC 로지스틱스도 테슬라 세미 50대를 캘리포니아 차량에 추가한다고 밝혔다. 항만 구간에는 325마일 주행거리의 스탠더드 레인지를, 남부 캘리포니아와 내륙 창고를 잇는 구간에는 500마일 롱 레인지를 투입한다. IMC가 보유한 무공해 차량 56대에 맞먹는 규모지만, 회사는 수소연료전지와 재생디젤 트럭도 함께 운영하며 한 가지 기술에 걸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생산 능력이 관건이다. 테슬라는 이번 주 네바다 세미 공장을 준비하며 연산 5만 대 규모를 내세웠지만, 애널리스트들은 2026년 실제 인도 물량을 5,000대에서 1만5,000대로 보고 있다. 롱 레인지 한 대 가격은 약 29만 달러다.
공급망이 갖춰질 때 숫자가 의미를 갖는다
이번 주문은 전기 트럭 확산의 걸림돌이 기술이나 수요가 아니라 금융과 잔존가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 신호로 읽힙니다. 화주들이 물량을 모아 구매력을 만들고, 금융사가 중고 가격 위험을 대신 지는 구조는 제조사 단독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장치입니다. 테슬라가 강조한 주문 규모보다, 운송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을 누가 나눠 갖는지가 이 사업의 실제 진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2,500대 가운데 테슬라 몫이 실제로 몇 대인지, 네바다 공장의 인도 속도가 애널리스트 추정치를 넘어서는지, 그리고 ZET 리스가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는지입니다. 잔존가치 보증이 자리 잡으면 다른 화주 연합도 같은 방식을 따라올 가능성이 크고, 그때 전기 트럭 시장의 병목은 다시 생산 라인으로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