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유클리드에 3150억 — 추론칩 다음 판 노려요

삼성전자가 네덜란드 AI 반도체 스타트업 유클리드(Euclyd)의 시리즈A 라운드에 공동 주도 투자자로 들어갔어요. 2억유로, 약 3150억원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딜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금액이 아니라 순서예요.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쥔 회사가 왜 지금, 왜 하필 ‘추론’ 칩 쪽으로 손을 뻗었는지부터 짚어볼게요.

삼성전자 수원본사 전경

추론 칩이 뭘까요

AI를 굴리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요. 모델을 가르치는 ‘학습’과, 다 배운 모델이 사용자 질문에 답을 내놓는 ‘추론’입니다. 그동안 반도체 시장의 화두는 학습 쪽 GPU에 쏠려 있었죠. 그런데 AI 서비스가 일상으로 퍼지면서 추론 호출량이 눈에 띄게 늘었고, 이 단계에서 전기와 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새로운 승부처가 됐어요.

학습은 한 번에 큰 전력을 몰아 쓰는 작업이지만, 추론은 하루 종일 조금씩 계속 돌아갑니다. 데이터센터 전력 부담이 커지면서 “GPU를 더 빠르게”보다 “같은 일을 더 적은 전력으로”가 중요해진 이유죠.

유클리드가 노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엔비디아 GPU를 더 빠르게 만드는 대신, 연산 장치와 메모리 구조를 처음부터 함께 설계해 추론에 필요한 전력과 비용을 낮추는 방식이에요.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주문형 반도체(ASIC)와 메모리, 데이터센터 시스템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묶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삼성이 산 건 지분만이 아니에요

이번 라운드에는 삼성전자가 100% 보유한 벤처투자 조직 삼성캐털리스트펀드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어요.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처럼 삼성 본업과 맞물리는 기술 기업을 주요 투자 대상으로 삼는 곳입니다. 삼성의 개별 투자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라운드에 서머싯캐피털파트너스와 EQT가 운용하는 스케일업유럽펀드, 이노베이션인더스트리스가 공동 주도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죠. 눈에 띄는 건 페터르 베닝크 전 ASML 최고경영자가 이번 투자와 함께 유클리드 이사회 의장으로 합류한 대목이에요. 반도체 노광 장비의 최정상에 있던 인물이 추론 칩 스타트업의 의장을 맡은 겁니다.

3월 노멀컴퓨팅, 7월 옥스믹 — 이어진 지도

삼성이 이 영역에 처음 베팅한 건 이번이 아니에요. 3월에는 AI 기반 반도체 설계 자동화 기업 노멀컴퓨팅의 5000만달러(약 680억원) 라운드를 주도했고, 7월에는 GPU 설계 지식재산권(IP) 기업 옥스믹의 3500만달러(약 480억원) 시리즈A를 공동 주도했죠. 삼성캐털리스트펀드 포트폴리오에는 추론 반도체 기업 그록, 칩렛 연결 기술 기업 엘리얀, 저전력 AI 가속기 기업 액셀레라AI도 들어 있습니다.

메모리에서 연산으로, 연산에서 설계로, 다시 시스템으로. 투자 목록이 옮겨가는 방향이 비교적 또렷합니다. 지금 삼성이 팔고 있는 것은 메모리이고, 다음에 팔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메모리를 얹은 시스템에 가까워 보입니다.

2028년이라는 시한과 남은 숙제

다만 유클리드는 아직 대규모 상용 환경에서 검증된 사례가 없어요. 2024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출발한 신생 기업이고,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입니다. 칩 설계 자체도 어려운 데다 양산과 고객 확보까지 넘어야 할 관문이 남아 있죠.

그럼에도 삼성이 이 카드에 베팅한 이유는 비교적 분명해요. 데데 골드슈미트 삼성전자 부사장 겸 삼성반도체혁신센터장은 유클리드 측 발표문에서 “AI의 다음 단계는 모델 혁신뿐 아니라 인프라의 효율성과 확장성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베르나르도 카스트룹 유클리드 최고경영자도 CNBC 인터뷰에서 “삼성은 자금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며 세계 최대 메모리 제조사 중 하나인 삼성의 엔지니어링 역량과 공급망을 근거로 들었어요.

삼성의 다음 10년, 이 베팅이 갈랐어요

이게 한국 반도체에 어떤 의미냐면요. 삼성이 추론 칩 생태계에 지분을 늘린다는 건, HBM과 파운드리로 대표되는 지금의 성적표만으로는 다음 10년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뜻이에요. 추론 칩 판이 커지면 그 위에 얹히는 메모리 수요의 성격도 함께 달라지는데, 메모리만 잘 만드는 회사가 그 판에서 어떤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2억유로 라운드에 글로벌 사모펀드와 유럽 정책 자금이 함께 들어왔다는 점도, 이 시장이 한 회사의 독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로 읽혀요. 유클리드의 2028년 상용화 일정, 그리고 삼성 파운드리와 메모리 조직이 이 회사와 어떤 형태로 손을 잡는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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